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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삭님은 글 어떻게 쓰세요?
    정보&번역 2019. 8. 11. 01:39

    동인생활 중 간혹 받는 질문이라서 그때마다 답변을 했었는데, 그 흩어진 답변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기록과 작법론 사이 어드메의 글입니다. 나중에 글 쓰는 방법이 변했을 때 다시 읽으면 즐겁겠죠!

    저는 배우는 입장일 뿐이고 조언을 할 계제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이 있다 정도, 재미로 봐주세요.

     

     

    ~워크플로우~

    요 몇 년 간 제가 원고를 써온 방식은 대략 이렇습니다.

    짧은 글은 대체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시작합니다.

     

    -메모를 많이 모은다. 주제에 대해, 캐해석, 구체적인 장면과 대사, 무엇이든 일단 냅다 모은다.
    -모은 메모를 인쇄한다. 딱히 정리는 하지 않는다.
    -그 중 무엇을 하나의 글에 넣을 수 있을지, 무엇을 연결할 수 있을지 찾아본다.
    -읽으면서 더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인쇄물에 마구 덧쓴다. 
    -메모를 대강 연결한다.
    -글을 쓰기 시작한다.
    -빈 부분이나 바꿀 부분이 있다면 쓰면서 채워나간다. 

     

    메모에 대해서는 저~~ 아래에서 이야기할게요.
    저는 짜놓고 쓰는 사람과 쓰면서 짜는 사람의 중간 정도입니다. 인생도 계획 없이 사는 타입이라 계획의 비중을 낮게 둡니다. 제가 글쓰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짜기보다 쓰기와 공개하기(!)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에 빨리빨리 돌입하느라 그렇습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는 제 최대의 약점은 부족한 논리력과 개연성인데, 이걸 메모의 양으로 어떻게든 보완합니다(아니면 감에 맡기고 아예 해석의 여지가 있도록 모호하게 밀어버립니다). 재료가 쌓이면 소위 말하는 신내림이 올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서술과 묘사~

    개개 문단을 채워나가는 문장을 쓰는 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적네요. 좋은 작법서를 참고하거나, 좋아하는 소설을 보고 어떻게 서술문을 쓰는지 관찰하거나 하는 정공법이 있겠습니다. 저는 묘사의 유려함에 덜 치중하는 편입니다. 전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쓰는 쪽을 선호하고, 때때로는 서술을 날려버리거나 대사 없이 몇 장을 밀기도 합니다.

    정 막힐 때에 쓰는 방법은 최근에 트위터에 말했었어요. 붙여넣어 둘게요. >>

     

    글 분량이 안 나올 땐 [배경 / 인물의 행동 묘사] - [내면이나 감각에 대한 서술] - [대사] 3개의 조합으로 빙글빙글 로테이션을 쌓아올라가면 좀 나아요. 객관-주관-객관, 시각-촉각-청각... 등등 다른 기준도 좋고요. 이 사이클로 쓰면 각 문단이 서로를 지탱해주면서 다음에 나올 내용을 받쳐주거든요.

    "잔게츠 무대 보세요" (<대사)
    단삭은 흥분했는지 (<감정) 손까지 휘저어 가며(<동작) 잔게츠 무대의 매력을 열렬히 떠벌거렸다. (<행동&감정: 말하는 사람을 보는 태도가 단어 선택에서 드러남) 누가 뜯어말리지 않으면 내일 밤까지라도 떠들 것 같았다. (<내면서술) 카페의 창은 공교롭게도 서향이어서, 찔러오는 햇살이 숫제 후광이다. (<배경)
    "알았어요. 볼게요." (<앞 문단에서 나온 결론)

    요소의 순서는 이래저래 바뀌어도 오케이입니다. 분량이 고민인 시기에는 이렇게 사이클을 순환시키면, 대사가 글 안의 작은 인과관계들의 꼭짓점을 찍어주면서 앞문단과 뒷문단을 이어 줘서 굉장히 편리해요. 그리고 더 집중하고 싶은 부분의 비중을 조금씩 늘려가고 그때그때 필요없는 요소는 제하는 거죠.

    이 방법에는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이 사이클을 맞추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묘사를 쓰다 보면 장면이 벌어지는 시공간에 점점 집중하게 돼요. 인물들이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몸짓으로 움직이느냐, 공기의 밀도는 어떻고, 빛은 얼마나 들고, 두드러지는 소리나 향은 있는지... 이것들도 글을 더 써나갈 단서가 됩니다. 여기에서 상징으로 쓸 만한 소재가 튀어나오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쭉 끌고 가면서 글 전체로 확장시키기도 합니다.

     

    ~플롯~

    썰로 풀었던 재밌는 장면은 일단 썼지만, 그것만으로는 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순서를 섞어 본다.
    -더 끼워넣을 다른 메모를 찾는다.
    -막힌 부분을 다른 장면과 연결할 때 그 사이에 일어날 법한 일들을 생각한다.
    -막힌 부분을 기준으로 인물들의 현재 감정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따로 적어 본다.
    -인물(특히 주동인물)에게 질문을 주고 답을 찾게 한다.
    -답을 정하고 질문을 해결하게 한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특히 마지막 두 개는 비교적 긴 글의 결말 부분을 정할 때 애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말을 먼저 정하고 글을 쓰라고 조언합니다만, 저는 결말에 대한 계획은 '언제 어느 장소에서 누가 무슨 대사를 한다' 식의 선명한 장면보다는 방향성을 두고 글의 내용에 맞추어가는 쪽을 좀더 자주 씁니다. (예외는 언제나 있어서 결말 장면부터 써 두고 시작한 글도 있습니다. 가이무 원고 중에서는 <그 사도는~>이 그렇습니다.) 

     

    답을 먼저 정한 경우에는 조금 더 편합니다. '저기까지 끌고 가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지?'로 시작하면 됩니다.
    ... 지금까지의 악행을 반성하게 하려면?
    ... ○○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게 하려면?
    ... 보금자리를 떠나게 하려면?

     

     

    써놓은 게 하필이면 중간 장면뿐이라서 앞뒤의 맥락이 필요할 때는?
    -일단 메모를 뒤집니다. 메모에서 앞뒤에 붙일 적당한 소재가 보이지 않으면, 그냥 그 중간을 글의 시작으로 두고 거기부터 결말까지만이라도 만듭니다. 그렇게 밀고나가다 보면 앞 내용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길게 쓰기는 좀 난해하지만, 어찌되었건 결말까지 쓴 글 하나가 나옵니다!
    이제 업로드하는 뿌듯함을 만끽합니다. 취미로 쓰는 글이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리트윗과 마음 개수를 헤아리며 행복하게(대체로 쓸쓸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멘션이라도 하나 받았다면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일어나서 어제의 뿌듯함을 원동력 삼아 다른 글을 쓰러 갑니다. 이번에는 근사한 첫 장면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그때 그 글을 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쪽팔려졌다면 삭제하고 고쳐써서 다시 올립니다. 고료를 받는 원고라면야 곤란하지만, 취미로 쓰는 글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디지털 만세! 아마추어 만세!

     

    ~결말까지 어떻게 가지?~

    저는 인물이 자기의 부족함을 받아들여 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쨌거나 성장 이야기는 참 좋습니다. 읽고 나면 뿌듯해서 뭔가 좋은 일에 시간을 쓴 기분이 듭니다. 누군가가 감명을 받고 삶의 자세가 바뀌었다고 말하기라도 하면 기적처럼 기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테디셀러라 참고할 자료도 많고, 엔간해선 질리지도 않습니다. 성장서사 써주세요!

     

    ...모범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지 않는 글이라 해도, 인물은 글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무언가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 변합니다.

     

    만약 변화가 없거나 딱히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왜 그 인물은 변하지 않는지가 이야기의 '질문'이 됩니다.

     

    스스로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인지?
    신념과 사상을 양보하지 않아서인지?
    주변의 상황, 다른 인물, 과거의 경험이 그를 제자리에 붙들어놓기 때문인지?
    그런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가능한지?
    타개를 원하기는 하는지?
    만약 그의 불변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요소가 사라져 버리거나 변화하거나 부정당한다면 인물은 어떻게 할 것인지?
    주변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성장을 하든 하지 않든, 글이 나아가려면 인물이 움직여야 합니다. 인물을 움직이게 만들 계기는 널렸습니다. 내 경험이나 주변에 일어난 일들을 보고 참고할 수도 있고, 글쓰는 사람들이 미리 골라 놓은 치트키도 엄청나게 다양합니다. 좋은 작법서마다 한 다스씩은 있을 겁니다. TRPG 룰북에는 실용적이고 보다 즉각적인 조언들이 많습니다.

    그 중 제가 자주 쓰는 치트키는 이런 것들입니다(항상 이 목록 전부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인물이 지키고 싶어했거나, 자각 없이 지켜 왔던 가치를 공격합니다.
    모르던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무시했던 것의 진가를 보여줍니다.
    선물이든 저주든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줍니다.
    이해할 수 없거나 두려운 것과 대면시킵니다.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을 빼앗습니다.
    오래 전 포기했거나 잊었던 것을 떠안깁니다.
    몰아붙이고, 소모시키고, 의심하게 하고, 선택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인물이 움직이며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봅니다. 인물이 자기를 바꿀지, 세계를 바꿀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어느 쪽도 바뀌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를 이야기합니다.

     

    열거해 놓고 보면 자극적이지만 딱히 거창하고 불행할 사건일 필요는 없습니다. 리액션을 강요하는 액션이라면 됩니다. 부엌에서 큼직한 벌레가 튀어나왔는데 벌레의 다리 개수가 내 나이만큼 드글드글하다면 그것도 두려운 것과의 대면입니다. 다음 해에 다시 그 벌레를 맞닥뜨렸더니 내 나이와 똑같이 다리가 하나 늘어 있다면 의심이 시작될 거고요.

     

    이럴게 질문과 답을 반복하고 간혹 신내림을 받다 보면... 어케... 완성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학교에서는 글에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글쓰는 사람에게 주관성이 있는 이상, 주제는 넣기 싫어도 들어갑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다만 주제에 좀더 초점을 맞추느냐, 간접적으로 반영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주제를 정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캐릭터를 조형하는 것도 좋지만 부담이 좀 있습니다. 잘 쓴다면 굉장히 짜임새있는 글이 됩니다. 교과서에서 읽었던 글들의 꽉 짜인 조형을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주 쓰지는 않는 방식입니다. 2차창작이라면 그냥 '내 최애캐가 예쁘다' 같은 주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이나 담론 등등은 인물을 다루다 보면 어찌저찌 간접적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모든 인물은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정말로 딱 내가 아는 만큼만 반영되는 요소니, 평소에 편식하지 않고 책을 읽으면서 글에서 내 미숙함이 덜 티나기를 기원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는 듯합니다.

     

    ~역시 자료가 많아야 글을 쓸 수 있을까?~

    자료조사는 뭐... 저는 최근에 한 원고는 대부분 2차창작이기 때문에 원작 고증 이외에 거창한 조사가 필요한 적은 그다지 없었어요. 검색 좀 돌리고... 평소에 관심있는 주제였다면 논문이나 책을 한둘 사서 훑어봐도 괜찮고... 모자라다 싶으면 좀 더... 그 이상의 고증이 필요한 글은 쓰려고 하지 않는 편이네요. 반성하자.

     

    좀 급진적인 의견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자료조사보다도 쓰기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쓰다가 자료가 부족해서 막히는 타이밍을 겪고 나면 누가 등떠밀지 않아도 검색이라도 돌리게 됩니다.

    며칠 전 트윗을 인용합니다>>

    글을 써보고 싶지만 내게는 아직 그럴듯한 발상이나 지식이 없으니 책 100권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 ← 머릿속에서 글쓰기가 점점 신격화됩니다. 안 쓰게 됩니다.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이 그 글을 쓰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에요. 나중에 아쉬워질 수도 있지만 그럼 그때 고치면 돼요.

    분명 당신의 글은 새롭지 않습니다. 모든 새로운 것은 이미 쓰여졌습니다(이게 누구의 명언이었는지 구분하는 일이 의미없을 만큼). 당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 담론, 소재는 이미 그것에 인생을 건 전문가들에게 수십수백권의 책으로 분석되었습니다. 그건 아주 당연한 거니까 압도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그렇지 않다면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은 서사와 묘사와 사상의 미답지를 의식하면서 목적지를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는 것, 좋아하는 것부터 씁니다. 쓰면서 즐거우면 성공,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즐겁다면 또 다른 성공입니다. 만약 미답지가 즐거워 보이는 날이 오면 그때 공부하면 됩니다.

     

    ~이론과 실제~

    다른 작품을 인용해서 '이 글은 이렇게저렇게 썼을 것 같다'라고 추측하는 것보다는 좀 무안해도 제 경험으로 이야기를 풀어놓겠습니다. 사실 저는 제 글을 엄청 좋아합니다. 저를 성장하게 만든 글이라면 더더욱 좋아합니다.

     

    정말로 제 글이 (특히 원고가) 어떤 과정으로 쓰였는지, 앞서 말한 워크플로우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워크플로우가 먼저 굳어져 있고 글을 쓸 때 그것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뒤돌아서 지금까지 쓴 글들의 평균치를 낸 결과가 앞서 한 이야기들일 뿐, 변수는 언제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이 웹공개되었고, 어느 정도 분량이 있고, 제가 글쓰기 과정을 기록해 두었던 글을 예로 들겠습니다.

    <유령-센고쿠 드라이버 개발일지>(link)입니다.

     

    접은 글에는 <가면라이더 가이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령>원고 전체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혹시 안 읽으셨다면... 관심 있으시면... 나름대로 재미있으니까... 위에 링크도 있으니... 읽어 보셔도...??

     

    ...

    ...더보기


    <유령>은 변화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이무 본편의 내용이 그러니, 결과값을 처음부터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답이 있으니 질문을 채웠습니다. 어째서 변하지 않았을까? "악역이라서"로 끝낼 수도 있지만, 모처럼 동인이니까 고정된 결말에 그럴듯한 중간과정을 붙인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료마가 만든 센고쿠 드라이버가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열었다는 아이러니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트윗을 수백 개는 했습니다. 료마는 악인이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세계를 구했다니!
    그래서 원고로 쓰자고 결정했습니다. 원작 대사들을 뜯어보고, 그때까지의 썰과 캐해석을 닥치는대로 인쇄해 메모를 하고 들여다보면서 이래저래 생각했습니다.

     

     <유령> 초판의 메모는 이런 식의 A4 8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캐릭터 해석, 구체적인 장면과 대사, 원작의 인용문, 그냥 캐릭터에 대해 했던 잡담 트윗도 뒤섞여 있습니다. 앞뒤로 보면서 마구 줄을 치거나 강조를 하거나 메모를 덧썼습니다.

    이런 식으로 글에 집어넣을 수 있을 법한 구체적인 장면들 몇 개, 그리고 직접 서술되지 않고 배경으로 깔 설정과 해석을 골라두었습니다. 인용하면 좋을 법한 책도 좀 뒤져봤습니다. 자료를 읽는다고 다 기억하거나 소화하지야 못하지만 무의식 어딘가에는 그 부피가 남...는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요. (취미활동이니 기분이 좋은 건 중요합니다.) 플롯 전체를 빡빡하게 정하지는 않고, 빈 부분은 쓰면서 채워넣기로 했습니다.

     

    <유령>에서 그가 변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복합적으로 택했습니다. 다 넣는 쪽이 더 설득력있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네요.

    과거의 경험 - 어릴 때부터 비대했던 지성으로 인해 or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의 경험에서 스스로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인간의 신체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의 영향이 더 큰지는 굳이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상은 성장하면서 굳어져 그는 신체뿐만 아니라 생명 전체를 경시하게 됩니다. (몸에 대한 인식이 공감능력과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는 물론 비약입니다. 메를로-퐁티의 몸 담론을 서브컬처적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살짝 끼얹었습니다. 물론 논문이라면 이러면 큰일납니다.)
    양보할 수 없는 사상 -  료마는 자신의 이런 사상이야말로 세계를 오독 없이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렌즈이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아집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저들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존재라는 결론이 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령'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다른 인물이 붙들어놓는다 - 1. 타카토라는 사명에 매몰된 나머지 모든 가까운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료마의 탈윤리적인 면모를 아예 인식하지 못해 악화시킵니다. 동시에, 그 몰이해 덕분에, 그는 료마가 인류의 신이 될 길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초판에서는 없었다가 개작에서 추가된 부분) 2. 아마기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비대한 지성을 문제시하기는커녕 북돋워 이용하려 합니다.

    배경이 나왔고, 사상이 나왔습니다. 주변 인물들은 그를 놔두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밀어붙이도록 세팅되었습니다(물론 본편에서 주어진 단서를 배치한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잡은 사상을 어필하면서 전개 부분을 쌓아나갑니다. 트위터에서 '이런 장면 보고 싶다' 하며 쌓아둔 썰들을 그럴듯한 순서로 재배치해서 등판시킬 차례입니다.

    하지만 료마가 제 입으로 "나는 인간의 신체가 가치없다고 생각해!" 라고 육성으로 말하면 너무 노골적일 거예요. 그래서 센고쿠 드라이버가 나옵니다. 순서를 더 정확히 따지자면, 제가 센고쿠 드라이버라는 소재로 료마를 설명한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소재를 전면에 세우기 위해서 앞선 설정과 배경을 짠 것입니다. 드라이버의 개발 과정과 맞물리도록, 료마의 캐릭터성 중 조명하고 싶은 부분을 짚어줍니다.

    센고쿠 드라이버는 료마의 사상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센고쿠 드라이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료마는 자신의 정신 또한 몸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모든 인간을─10억명뿐입니다만─자신과 같은 자리로 데려오고자 합니다. (드라이버의 개발엔 그 이외의 다른 목적들도 있지만 제 글을 제 입으로 다 설명하기엔 좀 쪽팔리니 생략합니다. 글에 다 써 뒀습니다.)

     

    드라이버는 순조롭게 완성되어 갑니다. 재록본에서 추가된 인명사고 장면은 료마의 몸-없음이 단순한 사상차 이상으로 생명경시까지 다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것은 '료마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딱히 그의 행동에 변곡점이 되지 않습니다. 그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문젯거리가 필요합니다.
    ☞그의 불변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요소가 사라져 버리거나 변화하거나 부정당한다면?
    이건 애저녁에 원작에 나왔습니다. 2차창작은 편리합니다. 
    - 타카토라는 사실 인간을 사랑합니다. (모르던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는 드라이버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몸 모두를 살리고자 합니다.
    - 코우타와 카이토는 드라이버를 통해 발돋움해 각자의 이상을 추구합니다. (무시했던 것의 진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신의 사상이─여기에서는 자신의 사상을 담은 대리물이─거듭 부정당할 때 료마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답은, 마찬가지로 편리하게도 원작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다 쓴 겁니다. 료마는 깔보고, 비웃고, 매도하고, 결국 분노합니다. 

    가장 중요한 소스가 원작에 있으니 새 문답을 짜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지금까지 글 안에서 쌓은 논리가 그럴듯한지, 원작의 내용과 들어맞는지 확인하고, 덜 설명된 부분이 있다면 보강합니다. <유령>에서 밋치와 료마가 대화하는 짧은 장면은 잘라낼지 남겨둘지 꽤 고민했었는데, 이 보강을 위해서 놔두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료마가 윤리에 얽매이지 않을 뿐 딱히 악을 지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글에서 많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앞서서 타카토라와 나눈 대화들에서 보여준 것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벌써 결말입니다. 결말도 이미 원작에서 정해져 있죠. AU로 선회해서 다른 결말을 줄 수도 있지만 저는 원작이 좋으니 따라가기로 처음부터 정해 두었었습니다. 같은 장면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쭉 료마와 몸에 대해 썼으니, 마지막에서는 그가 그토록 외면해온 몸의 제약에 붙들린다는 점에 카메라를 고정했습니다.
    여기서 권선징악 서사가 되어 버린다면 글의 지향점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선악의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인물의 내면에서 서술하고 몸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료마의 비윤리성은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글의 마지막에 그는 자신 또한 처음부터 세계의 어엿한 구성원이었음을 깨닫습니다만, 그렇다고 <유령>이 성장서사인 것은 아닙니다.

     

    후기를 씁니다(저는 제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후기를 쓸 때 정말 행복합니다!). 제목을 그대로 쓸지 새로 붙일지를 정하고 표지를 만듭니다. 출력소에 주문을 합니다. 책이 나옵니다.

     

    책을 내고 몇 개월 뒤에 <가이무 외전 - 잔게츠/바론편>이 나오고 료마에 대한 새로운 뒷설정이 풀렸습니다.

     

    이때 저는 이미 <인간의 산책> <유령-센고쿠 드라이버 개발일지> <얼굴을 마주하는 예의> <그 사도는 신에게 생명을 기대지 않는다> 4개의 원고 사이사이에 접점을 넣어 하나의 연작으로 이어놓은 상태였습니다. 이 4연작이 '있을 법한 이야기'로 느껴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원고와 원작의 내용이 너무 충돌하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원작 설정에 맞추어 <유령>을 개작하기로 했습니다.

     

    재록본용으로 개작할 때는 초판 때의 메모를 다시 꺼냈습니다.  (저는 원고 메모를 버리지 않고 따로 파일에 보관합니다.) 그리고 초판에 넣고 싶었지만 분량이나 타이밍의 문제로 넣지 못했던 내용이 무엇이 있는지 손으로 쓰면서 확인했습니다. 그동안 트위터에 올렸던 썰-메모 중 새 원고에 넣을 만한 것들을 또 프린트해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설정에 맞추려면, 몇몇 장면을 버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장면이 글 속에서 하는 역할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놓치는 장면이 없도록 초판의 모든 장면을 의미 단위로 분해하고, 번호를 붙여 '시퀀스 노트'를 만들었습니다. '시퀀스 노트'는 그냥 부를 이름이 필요해서 적당히 붙인 이름입니다.

    시퀀스노트를 참고하면서, 삭제된 장면을 대체하는 장면을 새로 쓰기로 했습니다. 주제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한 장면도 있습니다. 새로운 장면들도 대부분 그간 써 두었던 메모들에 기반했습니다. <유령> 초판은 40페이지의 카피본이었습니다만, 이렇게 개작하자 70페이지 정도가 되었습니다.

     

    <유령> 시퀀스 노트: 초판 (초판 글을 쓰는 도중에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개작판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정리한 것입니다.)

    <유령> 시퀀스 노트: 개작판

     

    시퀀스 노트는 제가 글쓰기의 과정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 '이 장면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라는 가이드라인이 절대 아닙니다! 글의 의미는 읽는 사람의 것이니까요! 참고하실 분은 정말로 참고만 해 주세요.

     

     

    글쓰기에는 집필용 프로그램인 [Scrivener]를 사용했습니다. 시간의 흐름보다도 글의 논리 순서를 파악하고, 어떤 소재가 이미 등장했고 무엇을 더 추가해야 하는지를 한눈에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스크리브너의 '코르크보드' 기능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좌측의 트리에서 초판과 개작판의 장면 차이를 보실 수 있습니다.

     

     

    ...풀어 놓으니 엄청나게 장황한데, 대충 이런 과정을 거쳐 원고 하나가 완성되었습니다. 계획부터 초판 완성까지 대략 2개월 정도가 걸렸습니다. 제가 쓴 원고 중 가장 과정이 복잡했던 물건입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고, 메모 한 줄에서 출발하거나, 그냥 보고 싶은 장면만 써서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만약 큰 글이 된다면, 그때부터 맨 위에 언급한 워크플로우로 설렁설렁 진입하는 식입니다.

    개개의 과정을 떼어놓고 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끈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건 어떻게 쓴 걸까' 하는 의문에 조금이나마 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 속의 글 - 트위터 메모~

    트위터에서 덕질을 하고 계신다면, 트윗을 일괄삭제하거나 계정을 삭제하지 마세요. 꼭 필요하다면 백업을 하고 그 백업을 다시 백업한 뒤에 하세요. 그러면 괜찮습니다.

     

    수많은 글쓰기 작법서에는 [끝없이 메모를 하라]는 단락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트위터로 대신합니다. 의식적으로 "나는 성실한 메모광이 되겠어!" 라고 결심한 것은 아닙니다(3페이지만 쓴 메모 수첩이 집에 20권은 굴러다닙니다!). 트위터는 메모를 즐겁고 자발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원래 트잉여이기 때문에 메모 앱을 켤 필요도 없습니다.

     

    트윗을 나중에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예 아무것도 메모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 백 배 낫습니다. 선별하지 않더라도 검색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입니다. (저는 나중에 검색할 때의 편의를 위해 적어도 '이름'은 오타 없이 올리는 편입니다.) "최애캐 이름" from:계정아이디 로 검색을 돌리면 누구나 원고 소재 열 개는 나와요. 적어도 그 열 개를 합치면 하나는 나와요. 아직 쓰지 않았을 뿐...

     

    저는 @liztoku 계정을 외부 백업 사이트를 사용해서 1차 백업, 내킬 때 그걸 직접 읽으면서 영양가 있는 것들 위주로 개인 호스팅에 2차 백업, 그 개인 계정에 자동 백업 서비스를 설치해서 3차 백업하고 있어요.
    계정을 연동해 트윗 아카이브를 만들어 주는 사이트는 여럿 있습니다만, 저는 [twilog.org] 사이트를 이용 중입니다. 트위터 자체도 백업을 지원하지만, 많은 트윗을 한번에 내려받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애매합니다. twilog는 일단 백업 연동을 걸어 두면 소위 "트청"을 해도 트윗을 사이트 내에 보존해 줍니다.

     

     

    트위터에 가입한 2011년 6월 이래, 제가 쓴 거의 모든 원고는 이렇게 트위터에 올리고 백업한 메모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외는 한두 권 정도예요.
    글을 쓰는 과정을 공개하는 일을 꺼리시는 분께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 방식입니다만, 8년여간 겪은 바로는 날것의 데이터를 공개하는 걸론 의외로 큰일은 나지 않는 듯합니다. 슬픈 얘기지만 글은 쓸 사람만 씁니다. 다만 스토커가 꼬인 적이 있으시다면 재고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트윗으로 글의 결말까지 올리고 말았다 해도 (이건 비권장 사항이긴 합니다), 끝없이 흘러가는 트위터의 특성상 누구도 트윗 몇 개로 글 전체 내용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팬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팔로워가 생기고 내 트윗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분석 대상이 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마 그런 분은 이런 아마추어의 작법론을 읽으실 필요가 없겠지요...

     

    +장점
    + 글의 계획 단계에서 외롭지 않습니다. 운이 좋으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올 때도 있습니다. 단 처음부터 반응을 바라고 올리면 서글픕니다. 어디까지나 메모라는 마음가짐으로.
    + 관심사가 비슷한 트친이 있다면 대화를 하면서 이야기에 살이 붙기도 합니다. (그 소재를 글로 쓰게 될 때는 같이 대화한 사람에게 허락을 구합시다!)
    + 타임라인에 유사한 화제가 올라오면 예전에 했던 트윗이 기억나고 더 좋은 이야기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자주 할수록 느는 것 같습니다.
    + 백업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의식하면, 트위터가 어떤 화제로 뜨거울 때에 이야기를 얹기 전에 반 번 정도는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떠든 뒤에 백업 사이트로 들어가서 흑역사를 지울 수도 있지만 그 행동 자체가 창피하잖아요. 제가 좀 경솔하고 금방 분위기를 타는 편이라,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최소한의 리미터입니다.

    -단점과 주의점
    -- 가장 큰 단점은 썰을 풀고 썰로 만족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인데요... 저는 썰을 100개 던지면 그중에 정말 글로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소재가 하나는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연성 0개보단 1개가 언제나 더 나아요!

    -- 음습한 사람에게 얻어걸린다면 독이 될 수도 있으나... 사실 진짜 음습한 사람한테 걸리면 내가 숨만 쉬어도 꼬투리가 되죠(ㅠㅠ) 트윗으로 메모하기는 즐겁지만 개인정보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올리지 맙시다.

    -- 신상이 특정될 만한 일상생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면 따로 메모 앱에 기록하거나, "최애캐가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으로 치환해서 쓰는 것도 괜찮습니다.

     

    썰만 풀어 놓고 당장 글로 써내지 않더라도... 뭐... 취미인데 좀 설렁설렁 놀면서 할 수도 있어요... 제 저번 모온 배포본은 4년 전 썰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백업을 해 두었기 때문에 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 지금은 이렇습니다. 나중엔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 몇 년간은 이렇게 해오고 있네요. 나중에 글쓰는 법이 바뀌게 된다면 또 기록해 보겠습니다.

    참고가 된다면 기쁠 거예요! 같이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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